4천만 년이 지났고, 세리나 전역의 생명들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행성에 유입된 새들과 다른 생명들이 조상들과 매우 다른 모습으로 진화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외로운 키란 제도만큼 가장 빠르고 확연히 변화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세리나에서도 문자 그대로 고립된 이 제도는 지속적인 유동성을 보이며, 진화의 가장 이상한 해결책들 중 일부를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키란 제도의 독특한 풍토 중 하나였던, 강력한 포식자가 부재한 생태계에서 거대한 새들과 이들을 지배하던 육식 집게들은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2,500만 년이 흐른 지금, 제도의 새들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처브버드들은 오래 전에 멸망했고, 이들을 괴롭히던 육상 집게들은 새로운 경쟁자들과 가장 특이한 형태로 진화한 새로운 섬 고유 초식동물들이 등장하면서 위세를 잃고 해변의 청소부로 되돌아갔습니다.
초기 키란 제도에는 처브버드 외에도 더 많은 토착 조류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조상들은 다른 대륙에서 진화한 것이 아닌, 극초기 키란 제도에 유입되어 이곳에서 살아왔습니다. 처브버드들이 큰 덩치로 섬을 지배하는 동안 더 작은 새들은 자신들만의 길을 찾아냈습니다. 초기 카나리아들은 빠르게 식성 전문화를 이루었으며 일부는 땅에서 먹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종들이 크게 자라지도, 초식동물이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5백만 년 후, 키란 제도는 날지 못하는 다양한 종류의 소형 잡식성 육상 조류들의 서식지가 되었습니다. 메추라기와 비슷하게 이들은 곤충, 씨앗, 작은 동물 등 숲 바닥에서 찾을 수 있다면 거의 무엇이든 먹었습니다. 그리고 처브버드와 달리 이들은 조숙성 새끼들을 낳으면서 위협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
이들 중 일부는 다시 수백만 년이 되어 식충동물로 진화했고, 그들 중 하나는 일반적인 새들은 접근할 수 없는, 깊은 진흙 속에 숨은 벌레들을 잡기 위해 매우 긴 부리를 진화시켰습니다. 1,500만 년이 지난 결과 메추라기를 닮았던 카나리아의 후손들은 키위의 모습을 닮기 시작했습니다. 적과 경쟁자를 피하기 위한 야행성 생활을 하면서 눈 역시 퇴화했습니다. 처브버드의 발치에서 살아가던 이들은 집게들의 포식을 피하기 위해 깊고 구불구불한 지하굴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고, 이를 위해 더 긴 발톱도 진화시켰습니다. |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카나리아-키위들 중 일부는 야간에 활동하고 굴을 파는 생활에 완전히 적응했습니다. 이들은 이제 뛰어난 후각과 촉각을 통해 먹이를 찾습니다. 이 과정에서 조상의 입과 콧구멍 측면을 따라 나 있던 입술 조직에서 유래한, 매우 민감한 피부층이 부리 끝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2,500만 년이 흐르자 부리는 넓고 평평해져서 발톱으로 퍼낸 흙을 옮기는 용도가 되었고, 얼굴 깃털에서 진화한 수염 같은 강모는 땅 밑에 둥지를 틀거나 어두운 숲 속에서 먹이를 찾을 때 새의 촉각을 더욱 활성화시켰습니다. |
부리의 상당 부분을 덮고 있는 이 연조직으로 인해 이름이 붙은 연부리새(Sofbilled bird)들은 키란 제도 전역에 걸처 그들이 멸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지속될 여러 주요 조류 분류군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새들에게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삼족(三足)보행을 실험했습니다. 부리를 세 번째 다리처럼 사용하는 것입니다.
4천만 년 뒤: 스누팔로(Snuffalo)
키란 제도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되었습니다. 섬의 숲들은 초원이 대체하게 되었고, 정글은 경사지나 저지대 협곡으로 밀려났습니다. 하지만 기후는 당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강수량도 여전히 많습니다. 키란 제도는 이제 대규모 초식동물 무리의 서식지가 되었고, 이들은 수백만 년 동안 활동하며 풍경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이들은 위에서 보면 거의 소만큼 커 보이지만, 옆에서 보면 우스꽝스러워 보일 정도로 짧습니다. 몸체가 덥수룩한 깃털로 덮여있는 탓에 원래 몸체의 모습을 가늠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이들의 다리는 작지만 튼튼하며 땅에서 몸을 살짝 들어올리는 정도에 그칩니다. 머리는 매우 거대하며 부리는 아래쪽을 향해 있고, 윗턱은 대부분 연조직으로 덮여 있으며 끝부분에 분쇄를 위한 단단한 부분에서 끝납니다.
이들은 날개가 전혀 없으며, 작은 다리로 몸을 밀어낸 뒤 부리를 지팡이처럼 땅에 짚으며 걷습니다. 강력한 목 근육 덕분에 이들은 한 번에 1미터 정도를 나아갈 수 있습니다.
스누팔로는 놀라운 동물입니다. 이들은 식충동물의 후손임에도 완벽한 초식성으로, 처브버드의 멸종으로 생겨난 진화적 공백을 이용해 거대화하고 다시 주행성이 되었지만 여전히 조상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눈은 여전히 작고, 색맹에 가까우며 심한 근시로서 생존을 위해 시각에 거의 의존하지 않습니다.
스누팔로는 여전히 촉각에 의존해 길을 찾는데, 민감한 부리로 흙 속의 진동을 감지하고 부리 주변에 돋아난 0.5인치 길이의 강모를 통해 주변을 감지합니다. 이들은 안전을 위해 큰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그 규모는 찾을 수 있는 먹이의 양에 의해서만 결정됩니다. 스누팔로는 무리를 지어 섬을 돌아다니며, 느리지만 꾸준히 앞에 있는 모든 식생을 베어냅니다.
이들의 부리는 위쪽이 더 길고 강하며, 아래턱은 자유롭게 여닫을 수 있습니다. 스누팔로는 부리로 초목을 잔뜩 물고 잡아당긴 뒤 위쪽 부리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대고 잘라냅니다.
본래 조상들이 굴에서 곤충을 끌어내기 위해 발달시켰던 길고 유연한 혀는 이제 잘라낸 풀더미를 목구멍으로 집어넣는 데 쓰입니다. 그렇게 모든 풀더미를 삼키면, 스누펄로는 부리를 들어올린 뒤 식사를 반복하기 위해 한 걸음을 더 내딛습니다.
이렇게 스누팔로 무리가 먹이를 먹고 지나가면 잔디는 빠르게 회복할 수 있지만 나무의 묘목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때문에 스누팔로가 접근하지 못하는 경사면이 아니라면 숲은 회복하지 못합니다.
스누팔로는 지표 1미터 이내에서만 먹이활동을 하기에 성목에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수백만 년 동안 묘목을 계속 먹어치우면서 후손을 남기지 못한 끝에 섬 식생의 주류를 초원으로 바꿉니다. 따라서 스너펄로는 비의도적인 생태공학자로서, 자신들이 먹이로 선호하는 식생만 남겨둡니다.
체중은 900파운드까지 나가는 이 거대한 새는 거대하지만 부드러운 자신의 부리를 체중을 지지하는 제 3의 다리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바다 건너편 육지에서 한 방문자가 찾아온 뒤, 스누팔로의 섬 생활은 목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약 1,200만 년 전 초기 육식 카나리아의 일종인 슈라이커 한 무리가 이동 중 강력한 해상 폭풍에 휘말려 길을 잃고 이동 경로에서 멀리 떨어진 이 제도에 흘러들어왔습니다.
원 서식지의 생태계에서 이들은 자신들보다 더 큰 경쟁자들 때문에 생태적 지위가 높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맹렬한 포식자임에도 곤충이나 다른 카나리아들의 어린 새끼 이상은 사냥하지 못하는 채로, 3천만 년 처음 출현한 이후 원시적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키란 제도의 새들은 포식자가 없었기에 이 제도에 표류한 슈라이커들은 경쟁자와 먹이부족 우려 없이 빠르게 적응하면서 때까치핀치(Shrike-finch)로 발전했습니다. 이 과에 속한 새들은 맹렬한 조류 사냥꾸으로서, 매복해 있다가 먹잇감에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부리로 목을 물고 부러트리는 식으로 사냥했습니다. 이들은 키란 제도의 첫 번째 육식 조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너팔로는 덩치가 컸고, 간접적으로 섬의 숲들을 제거했기에 때까치핀치도 먹잇감에게 쉽게 들킬 수 있는, 매복이 어려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때까치핀치는 토착 조류들보다 더 높은 지능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은 조상 때부터 매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대륙에서 살았기에 큰 위협을 받지 않았던, 대부분의 제도 토착 조류들보다 이미 지능은 월등했습니다. 단지 이들이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기술을 필요로 했을 뿐이죠. 때까치핀치는 사회성을 가지고 협력하는 무리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대장 개체가 몰고 온 먹잇감을 매복해 있던 나머지 무리가 사냥감을 덮치는 식으로 사냥했습니다. 이것은 토착 조류가 적응하기 위해 몇 세대가 걸릴 정도로 매우 성공적인 전략이었지만 역설적으로 다른 문제를 불러왔습니다. 토착 조류 중 일부가 대응 전략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때까치핀치에게 잡아먹혀 멸종한 것입니다.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때까치핀치는 다시 혁신을 필요로 했습니다.
명금류가 사라지면서 때까치핀치가 혼자서나 작은 무리로는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날지 못하는 조류들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자신들보다 훨씬 큰 먹잇감을 건드리기라도 하려면 이들은 더 철저히 협력해야 했습니다.
때까치핀치 한 종은 모두 친족 관계는 아니더라도, 다세대로 구성된 큰 무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새끼들은 부모의 무리에 머물다가 혈연관계가 없는 배우자를 같은 무리로 데려와 번식했고 그 결과 무리의 규모가 50마리 이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인 힘으로 때까치핀치들은 큰 사냥감을 잡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부처랩터(Butcherraptor)
때까치핀치는 수십 마리씩 결속력 있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이곳에서 가장 큰 새들도 자신들이 뭉쳐 공격하면 잡을 수 있다는 것을 학습했습니다. 혼자 있다면 포식자든, 피식자든 약할 뿐이라는 것이죠. 이 사실은 스너팔로와 포식자인 대형 때까치핀치, 부처랩터(Butcherraptor) 모두가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몸무게 8파운드까지 나가는 부처랩터는 가장 큰 때까치핀치는 아니지만 가장 무시무시한 종입니다. 스누팔로와 비교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열세지만 딱 한 가지, 지능만큼은 예외입니다. 이 포식자는 교활하고 눈치가 빠르며, 필요한 계획을 세우고 변경할 수 있습니다. 부처랩터는 현재까지 세리나에 등장한 새들 중 가장 지능이 높을 것입니다.
부처랩터는 작지만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인 사회적 포식자입니다. 닭 정도의 크기임에도 섬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로서, 자신보다 100배 이상 무거운 동물을 주식으로 합니다.
부처랩터는 날개가 너무 작아서 거의 날지 못합니다. 이들은 날지 못하는 대형 조류를 사냥하는 데 특화되었기에 로드러너처럼 지상을 달립니다. 이들의 무리는 개활지에서도 주저없이 활동하는데, 무리를 지었기에 다른 포식자들로부터 안전할 뿐 아니라 스너펄로가 이들를 따돌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번식기 동안 새끼들을 지키는 몇몇 개체들을 제외하면 무리 전체가 사냥에 동원됩니다. 물론 은신처가 없기에 스누팔로도 이들의 존재를 눈치채고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랩터들이 긴 풀숲에 숨어 모습은 감출 수 있지만, 스누팔로는 이들의 냄새와 랩터들이 접근할 때 자갈밭에서 발톱이 딸깍대고 풀줄기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스누팔로는 한 곳으로 빽빽이 모여든 뒤, 고개를 숙여 다른 개체들의 깃털 아래로 고개를 밀어넣은 뒤 주저앉아 방어 자세를 취합니다.
이 자세는 부처랩터들이 노리는 약점인 눈과 콧구멍, 총배설강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부처랩터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동료의 두꺼운 깃털과 등 부분의 지방층으로 취약한 부위를 보호합니다.
한편 부처랩터들은 침착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스누팔로들이 앞다투어 무리 가운데로 파고들려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이들은 스누팔로의 등에 올라탄 뒤, 무리 위에서 돌아다니며 가장 쉬운 먹잇감을 찾습니다.
이들은 다음 행동을 위해 끊임없이 동족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다른 개체의 동의 없이 단독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주로 새끼를 노리지만 약점이 노출되었다면 어떤 개체든 노립니다.
약점이 보이지 않는다면 부처랩터들은 가장자리에 있는 개체들을 공격해 도발하면서 참다못해 자신들을 공격하려는 스누팔로가 나오도록 유도합니다.
부처랩터는 스누팔로보다 민첩하기에 거의 대부분의 반격을 피할 수 있으며, 이를 노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부처랩터들이 성난 스누팔로의 얼굴에 달려들어 날카로운 부리로 눈과 부리의 민감한 피부층을 공격합니다.
이렇게 하면 무리를 효과적으로 혼란에 빠트릴 수 있습니다. 만약 무리 전체가 흩어지면 부처랩터들은 더 쉬운 사냥감인, 무리 가운데 숨은 새끼들을 노릴 기회가 생깁니다. 이런 경우 랩터들은 첫 목표물을 버리고 더 쉬운 새끼들을 덮칩니다.
일부 개체들이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스누팔로의 주의를 끄는 사이 나머지는 새끼를 해치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항상 성공하지는 않는 것이, 무리의 다른 스누팔로들이 도망치는 대신 공격받는 동족을 구하러 달려온다면 사냥감을 잡으려다 스누팔로의 부리에 물리거나 짓밟힐 위험을 감수할 수 없기에 종종 후퇴합니다.
건강한 성체 스누팔로의 사냥은 매우 어려우며, 보통 무리에서 밀려난 늙고 병든 개체를 노립니다. 소름끼치게도 부처랩터의 부리는 스누팔로의 두꺼운 가죽을 찢기에는 너무 약하고, 대신 가장 부드러운 부위부터 시작해서 안에서 밖으로 파먹습니다.
한 무리의 부처랩터들이 어린 스누팔로를 고립시키고 약점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각각의 크기는 닭 정도지만, 수적 우세를 통해 가랑비에 옷이 젖듯 먹잇감을 압도합니다.
부처랩터의 사냥 성공률은 50% 정도이며 주로 1살 이하의 새끼들을 노립니다. 육식동물 중에서 꽤 높은 사냥 성공률임에도 스누팔로의 개체수는 유지되는데, 덩치가 작기에 한 마리만 잡아도 몇 주치 식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누팔로는 1년에 열 마리 이상의 새끼를 낳기에 스누팔로와 부처랩터의 개체수는 균형을 유지합니다.
대부분의 성체 스누팔로가 부처랩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더라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냥에 실패하더라도 공격 과정에서 많은 성체들이 눈을 쪼여 실명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스누팔로는 먹이 탐색의 대부분을 촉각에 의존하기에 시력을 잃더라도 삶에 큰 지장이 오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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